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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리쉬의 생애3

그러나 브라마나 스와미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위대한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가나파티 무니(Ganapati Muni)였다.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났던 그는 놀라운 기억력과 무한한 능력을 지닌 동시에, 정직하고 마음이 따뜻하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서, 누구든 그의 앞에 있기만 해도 존경심이 우러나는 인물이었다. 1903년, 당시 25세의 젊은이였던 그는 티루반나말라이가 고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하여 이주를 했다. 그러나 1907년경에 이르자, 회의가 물밀듯 밀려왔다. 어느 더운 날 오후, 몹시 흥분한 그는 산을 올라 브라마나 스와미를 찾았다. 브라마나 스와미의 발아래 이른 그는 격정에 차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책을 다 읽었습니다. 심지어 베단타 샤스트라까지도 완벽히 이해했습니다. 또 최선을 다해 자파를 행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저는 타파스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당신의 발아래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저를 깨우쳐 타파스가 뭔지 가르쳐 주십시오.” 브라마나 스와미는 조용한 눈빛으로 그를 15분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했다. “‘나’라는 인식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면, 그때 마음은 그것(That)에 흡수된다. 이것이 타파스니라. 만트라를 반복할 때, 만트라의 소리가 나오는 근원을 관찰하면, 마음은 그것(That)에 흡수된다. 이것이 바로 타파스니라.”
이에 가나파티 무니의 의심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것은 단순히 브라마나 스와미의 말씀에 의해서라기보다 그에게서 분출되는 은총과 연민의 힘 때문이었다. 스와미로부터 나오는 자비의 힘에 압도된 그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는 브라마나 스와미를 위한 산스크리트 시를 지었다.

Ganapati Muni's handwriting. The quote says: "I worship the lotus like feet of the Teacher Sri Ramana Rishi, who revealed to me the resplendent Lord transcending darkness." (transl. Miles Wright)
팔라니 스와미로부터 브라마나 스와미의 원래의 이름이 벤카타라만이라는 것을 알고, 모든 사람들에게 브라마나 스와미를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Bhagavan Sri Ramana Maharishi)”로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바가반’은 ‘전능하신 신’을, ‘슈리’는 ‘스승’이라는 의미이다. 브라마나 스와미의 원래의 이름인 벤카타라만을 줄여 “참나 속에 즐겁게 있는 자”라는 의미인 라마나로, ‘마하리쉬’는 보통 현자인 리쉬가 아니라 베다 시대의 브야사(Vyasa)와 같은 현자라는 의미에서 마하리쉬라 하자고 하였다. 이 때부터 브라마나 스와미로 불리웠던 벤카타라만은 ‘라마나’로 또는 ‘마하리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선 ‘바가반’이 가장 일반적인 호칭으로 쓰였다.

가나파티의 도움으로 브라마나 스와미의 아쉬람을 찾은 최초의 서양인은 F. H. 험프리라는 영국 경찰관리였다. 그는 영국에 있는 친구에게로 보내는 편지에서 이 신비한 침묵의 힘을 이렇게 썼다. “동굴에 이르러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발아래 앉아 있기만 했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 앉아 있었는데, 내 자신으로부터 내가 빠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약 30분간 마하리쉬의 눈을 들여다보았으나, 그 깊은 응시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의 육체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의 도구임을 느낄 수 있었다. 움직임 없이 앉아 있는 그의 육신으로부터 신의 빛이 발하고 있었다. 그 때 나의 느낌은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슈리 바가반의 은총은 구도자의 가슴에만 도움이 된 것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 아이들 심지어 동물들까지도 슈리 바가반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렸다. 읍에 살고 있던 아이들도 비루팍샤 동굴로 와서, 슈리 바가반 주위에 앉고, 그의 주위에서 놀고는 행복한 느낌을 안고서 돌아갔다. 몸이 몹시 아픈 채 아들을 찾아왔던 어머니를 위해 슈리 아루나찰라에게 기도하자 깨끗이 나았다.
1916년, 라마나의 어머니 아라가말이 여생을 아들과 함께 보낼 작정으로 아루나찰라에 찾아왔다. 그녀는 장남을 잃었고, 막내며느리 또한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은 터였다. 막내아들 나가순다람은 아가멜루에 사는 아이 없는 누이에게 어린 아들을 맡기고, 어머니와 함께 성자가 된 형을 찾아 수행의 길에 나섰다.
어머니가 온지 얼마 후, 라마나는 비루팍샤 동굴에서 보다 윗쪽으로 옮겼다. 슈리 아루나찰라의 동남쪽 기슭에 나무들이 무성한 곳이 있었는데, 제자 칸다스와미(Kandaswami)가 이곳에 아쉬람을 짓자고 슈리 바가반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래서 칸다스와미는 숲이 무성하던 곳을 망고와 코코넛 나무가 있는 아쉬람으로 변화시켰다. 슈리 바가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수고를 아끼지 않은 제자의 이름을 따 스칸다아쉬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타밀어 칸다는 스칸다였다.
이후 슈리 바가반은 스칸다(Skanda) 아쉬람으로 거처를 옮겨 1916년부터 1922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 기간 동안에 많은 제자들이 와서 그와 함께 아쉬람에 머물렀으며 점차 어머니는 슈리 바가반의 헌신자들을 위하여 아쉬람의 부엌일을 맡았다. 그의 어머니는 나머지 생애 동안 슈리 바가반에게 먼저 음식을 올리지 않고는 자신의 음식을 결코 먹지 않는 깊은 헌신을 아들에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슈리 바가반은 어머니를 보살피면서 세상의 삶을 벗어난 영적인 삶을 살도록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다. 아들은 이제 어머니의 눈에도 성스런 존재로 비쳤다. 스칸다 아쉬람에서의 생애 마지막 몇 년 간, 그녀는 자신의 구원이 전적으로 아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달았으며 아들이 그녀에게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아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두려워, 단 하루라도 아들과 떨어져 있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네가 내 시신을 가시덤불에 던져 버린다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네 품안에서 날 죽게 해 주렴.”하고 말했다. 그리고 1922년 5월 19일, 운명의 날, 그녀는 소원대로 아들의 품안에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특별한 손길 아래 그녀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비로소 완벽한 사마디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Mothers tiny room
어머니의 시신은 산 남쪽 기슭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해방된 영혼인 갸니에 행해지는 엄숙한 예식을 치른 후 묻혔다. 어머니의 무덤 곁에는 작은 사원이 세워졌고 마하리쉬는 그곳에 매일같이 들렀다. 마하리쉬의 동생이 이 사원에 아예 기거하기 시작했고, 몇달 후, 마하리쉬도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스칸다 아쉬람의 제자들도 모두 그를 따라 내려왔고, 그리하여 형성된 것이 슈리 라마나스라맘(Sri Ramanasramam)이다.
처음엔 어머니의 무덤 곁에 세워진 허름한 초가 오두막이 전부였다. 그러나 인도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순례자와 제자들이 모여들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하리쉬가 기거하기 위한 약 50평 정도의 홀이 세워졌다. 그가 소박한 것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곳에 그를 앉히기 위한 긴 의자 하나를 강제로 들여놓았다. 그 후로 이곳은 그가 하루 24시간 기거하는 곳이 되었다.Path from Skandashram down to Virupaksha Cave
마하리쉬는 매일 규칙적인 일정에 따라 생활했는데, 그 중엔 하루 두 번 산책도 포함돼 있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루나찰라 산을 오르곤 했다. 이 세상에 그가 집착하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루나찰라 산이었다. 그는 이 산을 사랑했고, 이 산이 바로 신(神)이며, 이 세상의 심장, 혹은 영적 중심이라고 말했다. 아루나찰라의 산기슭을 돌아다닐 때 그는 가장 행복해 보였으며,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아루나찰라 산에서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8마일에 이르는 산 주위를 산책할 것을 권유하였는데 이렇게 아루나찰라를 도는 것을 기리푸라닥쉬나(Giripradakshina)라 하며, 이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매우 중요한 영적 수행의 하나였다. ‘푸라(pura)’는 모든 죄의 없앰을, ‘다(da)’는 갈망의 충족을, ‘크쉬(kshi)'는 환생으로부터 자유를, ‘나(na)'는 참나 지식으로 해방을 주는 이라는 의미이다.

대개의 경우, 마하리쉬는 주변의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하였으며, 지켜보는 자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정한 일에 대해서는 매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모든 방문객과 제자들이 자신을 언제든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에게 일어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마지막 날까지도, 이 원칙은 이어졌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곤 했다. 또한 그는 모든 방문객들에게 도착과 동시에 식사를 대접해야 하며, 이들의 식사는 잘 요리된, 영양가 있는 음식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주방 일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마하리쉬는 음식이나 안락함에 있어 자신이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누군가 특별한 음식이나 보약을 가져오기라도 하면 그는, ‘나에게 좋은 것은 모두에게도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야 자신도 그것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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